【출간준비】 피터르 브뤼헐의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출간 준비 선언
왜 브뤼헐의 《아이들 놀이》에 빠졌는가
왜 미술사가 아닌 ‘놀이’의 눈으로 그림을 읽는가
“동서고금, 아이들은 똑같다.”
서문 | 500년 전 골목길로 떠나는 놀이 인문학 여행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동서고금(東西古今)’.
이 생각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동서고금, 아이들은 똑같다.”
1560년,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아이들의 놀이》에 무려 246명의 아이들과 80여 가지 놀이를 담았습니다. 굴렁쇠를 굴리고, 대말을 타고, 공기를 하고, 팽이를 치며 온 동네를 거대한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 아이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우리 어린 시절과 닮아 있습니다.
500년 전, 서로 만나본 적도 없는 먼 나라의 아이들이 어떻게 이토록 비슷한 놀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저는 이 거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네덜란드의 문명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꺼내 들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통찰은 브뤼헐의 그림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놀이 속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경쟁하고 협력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어른들이 만든 엄숙한 도시와 광장마저 순식간에 자신들만의 놀이터로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이 그림 속 놀이의 이름을 찾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놀았는지, 어떤 규칙으로 움직였는지, 그 놀이가 오늘날 우리의 놀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500년 전 플랑드르의 골목길에서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의 놀이를 만나고, 익숙한 놀이와 낯선 놀이를 비교하며 동서고금의 놀이문화를 탐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어? 우리도 골목길에서 하던 놀이인데!”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만들어 낸 놀이가 이토록 닮아 있다는 사실. 저는 그 속에서 인류가 공유하는 신체 감각과 보편적인 심리, 그리고 놀이를 창조하는 인간의 놀라운 생명력을 발견합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단순한 옛 명화가 아닙니다. 500년 전 한 시대의 아이들이 어떻게 놀았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한, 인류 놀이문화의 거대한 보물창고입니다.
저는 명화 속 놀이를 해설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저 멀리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의 차가운 벽면, 굳어버린 액자 속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그림 밖으로 불러내어 독자 여러분과 함께 다시 뛰고 구르고 웃게 하고 싶습니다.
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가 그 놀이터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 위대하고 활기찬 놀이의 우주 속으로, 이제 함께 걸어가 보시죠.(서문 요약)
굴렁쇠|둥그런 굴렁쇠만큼이나 전 지구적인 놀이
500년 전 플랑드르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요? 브뤼헐은 《아이들의 놀이》 그림 맨 앞에 커다란 굴렁쇠를 굴리는 두 아이를 배치했습니다. 물론 그림 속 모든 놀이는 저마다 독립적인 모습과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둥근 물체만 보면 굴리고 싶어 합니다. 둥글지 않은 물건도 어떻게든 굴려 보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물체를 따라가며 누가 더 오래 굴리는지 겨룹니다. 굴렁쇠는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탄생한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놀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굴렁쇠 놀이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와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발견됩니다. 고대 그리스 유물에는 이미 굴렁쇠를 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고,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의 아이들은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둥근 테를 만들어 놉니다.
브뤼헐 그림 뒤쪽에는 오크통의 테를 굴렁쇠처럼 활용한 흔적도 보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나무통이나 술통의 테를 굴렸고, 자전거가 보급된 뒤에는 바퀴를 새로운 놀이감으로 활용했습니다. 주변의 물건을 무엇이든 놀이로 바꾸는 아이들의 창의력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굴렁쇠를 굴리는 두 아이는 한 손에 막대기를,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있습니다. 500년 전 플랑드르 아이들이나 오늘날의 우리 아이들이나, 놀면서 먹고 먹으면서 노는 모습까지 꼭 닮았습니다. 참 신기하고 귀엽지 않나요?(내용 요약)
꼬리 잡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난간에서 뛰어내리기|500년 전에도 얼음땡 놀이
아이들이 길게 늘어서 앞 아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신나게 ‘꼬리 잡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놀이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문화에 따라 이름과 의미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유럽에서는 ‘악마의 꼬리’라 불렸고, 벼농사가 발달한 동아시아에서는 용이나 뱀의 움직임과 연결해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림 조금 뒤쪽의 골목길에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술래가 기둥에 기대어 있다가 갑자기 뒤돌아보자 아이들이 일제히 얼음처럼 움직임을 멈춥니다. 팔을 치켜든 아이, 막 움직이다 그대로 굳어 버린 아이들…. 저는 이 장면에서 오늘날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계열 놀이의 중세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런 석상 놀이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오노마스티콘》에 기록된 아갈마타(Agalmata), 즉 ‘조각상 놀이’와도 닮아 있습니다. 이후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1, 2, 3 태양’, 이탈리아의 ‘1, 2, 3 별’ 같은 놀이로 이어졌습니다.
왜 아이들은 술래가 돌아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출까요? 어쩌면 그 속에는 위험한 순간 몸을 멈추고 숨었던 인류의 오래된 생존 본능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림을 다시 보면, ‘멈춤’과 ‘움직임’이라는 서로 다른 인간의 몸짓이 한 장면 안에서 묘하게 만납니다.
그림 아래쪽에서는 아이들이 서로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의 긴 몸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혼자 멈추고 숨는 놀이와 함께 움직이며 협력하는 놀이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나란히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간 위에 올라선 아이도 눈길을 끕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저 아이는 과연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동서고금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익숙한 놀이 본능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아이들 때문에 늘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500년 전 플랑드르의 골목길에는 멈추고, 달리고, 함께 움직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입니다.
브뤼헐의 그림은 그렇게 인류의 오래된 몸짓과 놀이의 기억을 한 폭의 유쾌한 놀이터에 담아 놓았습니다.(내용 요약)
리본 날리기·꽃바구니 열차|하늘까지 점령한 아이들의 놀이터
건물 2층 창가에서 펼쳐지는 아이들의 입체적인 놀이 모습이 정말 멋지네요. 왼쪽 창문에선 한 아이가 막대 끝에 하얀 긴 리본을 매달아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날리고 있어요. 허공을 향해 리본을 흔들며 바람을 다루는 손맛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 상상만 해도 귀엽고 예뻐요.
이 장면은 오늘날 리본 체조의 먼 조상 같은 놀이로, 긴 리본을 활용한 오랜 유희 문화를 보여줍니다. 유럽에서는 긴 리본을 마을 축제 때 기둥에 매달아 서로 꼬고 풀며 춤추는 메이폴(Maypole) 놀이와 춤으로 발전시켰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오색 천을 엮고 푸는 단심줄놀이와도 흥미롭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창문에서는 또 다른 아이가 바구니를 줄에 매달아 아래로 내리거나 옆으로 보내며 ‘하늘 열차’처럼 배달 놀이를 하고 있답니다. 이 바구니는 16세기 플랑드르에서 성 니콜라스 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성 니콜라스 날이면 착한 일의 보상으로 바구니에 과자나 과일, 장난감을 담아 받았고, 평소에는 책이나 물건을 담아 나르는 데도 활용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놀이가 굴렁쇠나 꼬리 잡기처럼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놀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입니다. 리본과 성 니콜라스의 바구니에는 당시 유럽의 축제와 종교,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브뤼헐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와 너무나 닮은 놀이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순간도 있지만, 동시에 16세기 플랑드르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낯설고 독특한 놀이문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이들의 상상력만큼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습니다. 종교 축제의 소품이든 평범한 생활용품이든 아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놀잇감으로 변합니다. 하얀 리본은 하늘을 춤추고, 바구니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는 신기한 열차가 됩니다.
같은 아이들이지만 놀이는 서로 닮기도 하고, 문화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기도 합니다. 브뤼헐의 《아이들 놀이》는 바로 그 보편성과 다양성을 한 폭의 그림 속에 함께 담아 놓은 놀라운 놀이터입니다.
에필로그
꼬마 거인들과 함께한 동서고금의 놀이 여행을 마치며
피터르 브뤼헐의 《아이들 놀이》 속 꼬마 거인들과 함께한 긴 여행을 마치며, 가슴 한편에 뭉클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1560년 플랑드르의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은 오늘날 우리의 어린 시절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굴렁쇠를 굴리고, 서로 겨루고, 뛰고, 웃고, 온몸으로 놀이를 만들어 갑니다. 반면 결혼식 놀이와 세례 놀이, 성가 행렬과 축제처럼 당시 플랑드르의 종교와 생활문화가 담긴 놀이는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이 그림에는 인류 놀이의 닮음과 다름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창조성입니다. 막대기와 천 조각, 빗자루와 짐승의 뼈까지 아이들의 손을 거치면 세상에 하나뿐인 놀잇감으로 변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을 놀이로 바꾸고, 놀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왔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떠오른 단어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이었습니다. 동쪽과 서쪽, 옛날과 오늘을 가로질러 인류의 놀이가 이토록 닮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속에서 인간의 공통된 지능과 창의력, 그리고 달리고 싶고, 숨고 싶고, 겨루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은 보편적인 마음을 발견합니다. 물론 놀이는 각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활방식, 역사와 문화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습니다. 놀이의 닮음은 인간의 보편성을 보여 주고, 놀이의 차이는 각 문화가 걸어온 고유한 역사를 보여 줍니다.
브뤼헐의 그림 속 작은 장면 하나는 때로 동서양의 놀이문화를 연결하는 흥미로운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연을 하늘 높이 띄우는 놀이가 발달했고, 유럽에서는 긴 리본을 휘날리거나 축제에서 서로 엮고 풀며 춤추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같은 바람을 맞으며 놀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놀이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책은 그림 속 놀이의 이름을 찾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자세와 움직임, 놀이 도구와 주변 환경을 살피며 그 안에 담긴 규칙과 원리를 찾아갔습니다. 500년 전 플랑드르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놀이를 연결하고, 그림 속 아이들을 다시 살아 움직이는 놀이의 주인공으로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제 《아이들 놀이》는 더 이상 미술관 벽에 걸린 오래된 명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림 속 아이들은 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달리고, 숨고, 웃고, 서로를 붙잡으며 놉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놀이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놀이는 지금 어디에서, 누구의 손길을 거쳐 이어지고 있을까요?
이 책이 브뤼헐의 그림을 넘어 여러분 자신의 어린 시절과 오늘날 아이들의 놀이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인간과 문화를 이어 주는 놀이의 힘을 믿으며, 꼬마 거인들과 함께한 이 명랑하고 뜨거운 여행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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